운명을 글자로 적기 시작하다
운명을 글자로 적는다는 발상은 어디서 왔나. 점과 명리의 갈림, 음양과 오행과 천간지지가 만나 사람에게 옮겨 적히기까지를 더듬는다.
사람은 오래전부터 제 앞날을 알고 싶어 했다.
내일 비가 올지, 이 싸움에서 이길지, 떠난 이가 돌아올지, 앓는 아이가 일어날지. 답을 알 수 없는 물음 앞에서 사람은 늘 무언가에 기대어 답을 구하려 했다. 그렇게 생겨난 가장 오랜 방법이 점(占)이다.
옛 중국 사람들은 거북의 등딱지나 짐승의 어깨뼈를 불에 구웠다. 열을 받은 뼈에 금이 가면, 그 갈라진 모양을 보고 하늘의 뜻을 읽었다. 이것을 복(卜)이라 한다. 시대가 흐르며 또 다른 방식도 자리를 잡았다. 시초(蓍草)라는 가느다란 풀줄기를 일정한 규칙으로 헤아려 괘를 뽑는 방법이다. 이쪽은 서(筮)라 불렀고, 우리가 아는 『주역』의 점이 여기서 나왔다.
방법은 달라도 점에는 한 가지 공통된 성격이 있다. 점은 묻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 사람이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해 한 가지를 묻고 답을 듣는다. 물음이 끝나면 점도 함께 끝난다. 같은 사람이 내일 같은 일을 다시 물어도 좋고, 답은 그날그날 달라질 수 있다. 점은 그때그때의 사정에 답하는 것이지, 그 사람이 본래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느 무렵, 점과는 사뭇 다른 생각이 자라났다. 앞날을 그때그때 묻는 대신, 사람이 태어난 그 순간에 이미 한 생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고 보는 생각이었다. 날 때 정해진 그 무늬를 읽어 내면, 묻지 않고도 그 사람의 타고난 바탕과 한 생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무늬를 읽는 일을 명리(命理)라 불렀다. 명(命)은 하늘이 내린 운명이고, 리(理)는 그 운명이 따르는 이치다. 타고난 운명에도 일정한 이치가 있다는 믿음이다. 점이 매번 새로 던지는 물음이라면, 명리는 태어날 때 단 한 번 적힌 글을 평생 들여다보며 그 이치를 더듬는 일이다.
문제는 그 글을 무엇으로 적느냐였다. 여기서 세 가닥의 오래된 생각이 만나 하나로 묶인다.
첫째는 음양(陰陽)이다. 세상 만물에는 짝이 되는 두 기운이 있다는 생각이다. 낮과 밤, 더위와 추위, 움직임과 멈춤, 채움과 비움. 어느 한쪽이 옳고 다른 쪽이 그른 것이 아니라, 둘이 서로 밀고 당기며 세상을 굴린다고 보았다.
둘째는 오행(五行)이다.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곧 나무와 불과 흙과 쇠와 물이다. 다섯 가지 기운이 서로 낳고 또 서로 누르며 끝없이 돌고 돈다고 보는 생각이다. 나무는 불을 낳고 불은 흙을 낳듯 서로를 살리는가 하면, 물은 불을 끄고 쇠는 나무를 베듯 서로를 누르기도 한다. 이 낳고 누르는 맞물림으로 만물의 생겨남과 사그라듦을 설명했다. 본디 음양과 오행은 서로 다른 데서 비롯한 별개의 생각이었다고 전한다. 그 둘이 하나로 엮여 세상을 함께 설명하는 큰 틀이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셋째는 천간지지(天干地支)다. 하늘의 열 글자인 천간은 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계(癸)이고, 땅의 열두 글자인 지지는 자(子)·축(丑)·인(寅)·묘(卯)·진(辰)·사(巳)·오(午)·미(未)·신(申)·유(酉)·술(戌)·해(亥)다. 본디 이 스물두 글자는 운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날과 해를 세던 달력의 부호였다. 천간과 지지를 차례로 하나씩 짝지어 돌리면 예순 가지 조합이 나오는데, 이것이 육십갑자다. 갑자에서 시작해 계해까지 한 바퀴를 돌면 예순이 차고 다시 갑자로 돌아온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이 육십갑자로 날과 해를 적어 왔다.
명리의 발상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났다. 날을 세던 글자를 사람에게로 옮겨 적은 것이다. 누군가 태어난 때를 천간지지로 적고, 그 글자에 음양과 오행을 입혀 어느 기운이 넘치고 어느 기운이 모자란지, 무엇이 무엇을 살리고 누르는지를 보았다. 그렇게 한 사람의 타고난 바탕을 읽으려 했다. 하늘을 향하던 물음이, 한 사람의 태어난 순간을 향한 읽기로 돌아선 것이다.
이것이 왜 새로웠나. 그전까지 글자는 무언가를 기록하거나 하늘에 묻는 도구였다. 그런데 명리는 글자로 사람 그 자체를 적었다. 한 사람의 운명을 한 편의 읽을 수 있는 글로 본 것이다. 점이 "이 일이 될까요"를 물었다면, 명리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묻기 시작했다. 앞의 것은 눈앞의 일을 향하고, 뒤의 것은 사람 자신을 향한다. 운명을 글자로 적기 시작했다는 말은, 바깥의 일을 점치던 사람들이 비로소 한 사람의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읽으려 한다. 손에 쥔 도구만 바뀌었을 뿐, 나라는 사람을 어떤 무늬로 풀어내고 싶은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명리의 역사를 더듬는 일은, 그러니 그 오래된 마음을 천천히 따라가 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참고
- 위키백과 「간지(干支)」 — 십간과 십이지를 조합한 육십갑자, 본디 날과 해를 세던 역법 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