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신은 표준이 될 수 있을까 (표준화)
억부부터 격명까지, 용신을 잡는 여섯 갈래를 지나왔다. 같은 사주를 두고도 답이 갈리는 이 자리에서, 용신은 과연 표준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여섯 갈래를 지나왔다. 누르고 보태는 억부, 데우고 식히는 조후, 막힌 사이를 잇는 통관, 병을 짚어 약을 쓰는 병약, 어느 글자로 쓸지 고르는 취용, 그리고 격과 용신을 한 이름으로 묶는 격명. 길게 늘어놓았지만 여섯은 따로 도는 여섯 개의 규칙이 아니다. 하나의 물음을 여섯 방향에서 비춰 본 것에 가깝다. 이 사주를 살리는 글자는 무엇인가.
그런데 여기서 솔직히 짚고 갈 것이 있다. 같은 사주를 놓고도 사람마다 용신이 갈린다. 누구는 약하니 보태라 하고, 누구는 차니 데우라 하고, 누구는 아예 대세를 따르라 한다. 한 사주를 두고 셋이 서로 다른 글자를 가리키는 일이 드물지 않다. 왜 그럴까. 용신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단 하나의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법을 먼저 세우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특히 갈리는 자리가 있다. 한 기운이 사주를 거의 다 채웠을 때, 그것을 거슬러 누를 것인가 아니면 그 대세를 따를 것인가. 지키는 길과 따르는 길, 이 경계에서는 오래 본 사람들조차 의견이 엇갈린다. 쉬운 사주에서는 대개 같은 답으로 모이지만, 이 경계에 서면 읽는 이의 눈이 갈라진다.
그렇다면 용신은 표준이 될 수 없는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사주에는 누구에게나 같게 따질 수 있는 바닥이 있다. 일간이 강한지 약한지, 어떤 격을 이루는지, 차고 더운지 마르고 젖었는지. 이런 것은 정해진 순서대로 차근차근 셈해 나갈 수 있다. 실은 옛사람들이 이 셈의 길을 꽤 촘촘히 닦아 두었다. 무엇으로 용신을 잡든 마지막에는 사주의 춥고 더움이 맞아야 비로소 풀린다던 그 이야기도, 닦여 있는 길 가운데 하나다.
문제도 답도 그 위에 있다. 객관적으로 셈할 수 있는 바닥은 누구나 같게 깔 수 있다. 그러나 그 바닥 위, 지키느냐 따르느냐의 경계에서 한 글자를 가리키는 일은 끝내 읽는 이의 몫으로 남는다. 그러니 용신을 표준화한다는 것은 사람을 지우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누구나 같게 깔 수 있는 바닥을 단단히 다져 두고, 사람은 정작 갈리는 그 한 자리에 온 힘을 쏟는 것이다. 셈으로 풀리는 곳은 셈에 맡기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판단에 집중하는 것.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다. 정답이 하나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말을, 아무렇게나 봐도 된다는 말로 들으면 곤란하다. 오히려 반대다. 단 하나의 답으로 못 박을 수 없기에, 읽어 가는 과정은 더더욱 객관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한다. 누구나 같은 규칙으로 강약을 따지고, 한 단계씩 근거를 밟아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야 설령 마지막에 의견이 갈리더라도 서로 어디서 왜 갈렸는지를 견주어 볼 수 있다. 근거 없이 느낌만으로 단정하는 것과, 객관적인 토대를 끝까지 밟은 다음 사람이 마지막 한 끗을 판단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직관이 설 자리는 논리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간 그다음이지, 그 앞이 아니다.
명리는 늘 그렇게 다시 쓰여 왔다. 운명의 기준이 태어난 해에서 태어난 날로 옮겨 가고, 흩어진 구결이 책으로 묶이고, 그때마다 바닥은 조금씩 더 단단해졌다. 지금 우리가 선 자리도 그 흐름의 한 마디일 것이다. 객관적으로 다질 수 있는 것은 더 단단히 다지고, 끝내 사람이 가리켜야 하는 자리는 더 또렷이 남겨 두는.
용신은 도장이 아니라 손가락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주 위에 꽝 찍어 운명을 박아 버리는 도장이 아니라, 이 사주에서 가장 귀한 한 글자가 여기 있다고 짚어 보이는 손가락. 셈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마지막 손가락은 사람이 든다. 그 손가락이 어디서 와서 어디를 가리키게 되는지, 그 이야기는 다른 자리에서 좀 더 길게 이어 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