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주, 갈리는 판단
같은 사주를 놓고도 명리가의 판단은 갈린다. 그 갈림은 명리의 허점일까, 아니면 사람을 읽는 일의 본래 모습일까.
명리를 조금 배운 사람이 처음 부딪치는 의아함이 있다. 같은 사주를 두 사람에게 보였는데, 풀이가 다르게 나오는 일이다.
한 사람은 이 사주가 신약하니 일간을 돕는 기운이 약이라 하고, 다른 사람은 살이 너무 강하니 그것부터 눌러야 한다고 한다. 한쪽은 물을 쓰라 하고, 한쪽은 불을 쓰라 한다. 둘 다 명리를 오래 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답이 갈린다.
처음에는 이것이 명리의 허점처럼 보인다. 같은 글자를 보고도 결론이 다르다면, 그게 무슨 학문인가 싶은 것이다. 별자리나 타로처럼, 결국 보는 사람 마음대로 아니냐는 의심이 든다.
그러나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갈림은 허술해서가 아니라 사주라는 것이 본래 그렇게 생겼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사주 하나에는 여러 힘이 얽혀 있다. 일간을 돕는 힘, 누르는 힘, 빼내는 힘이 한 그림 안에 같이 있다. 어떤 사주는 그 힘들이 한쪽으로 분명히 기울어 누가 봐도 답이 또렷하지만, 어떤 사주는 돕는 힘과 누르는 힘이 팽팽해 어느 쪽을 먼저 다스릴지가 갈린다. 신약한 일간을 돕는 것이 급한가, 아니면 그 일간을 위협하는 강한 살을 먼저 누르는 것이 급한가. 둘 다 일리가 있고,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다.
이것은 의사들이 같은 환자를 두고 다른 처방을 내는 것과 닮았다. 한 의사는 당장의 통증부터 잡자 하고, 다른 의사는 근본 원인부터 다스리자 한다. 둘 다 환자를 살리려는 판단이고, 둘 다 합당하다. 사람을 다루는 일에는, 정답이 하나로 똑 떨어지지 않는 자리가 있다.
그러니 명리가들의 갈림은 명리가 엉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라는 것이 그만큼 여러 결로 읽힐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답으로 가둘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오래된 학문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다만 갈린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갈리는 것은 아니다. 명리가들은 저마다 근거를 들고 갈린다. 어떤 힘이 더 무거운지, 무엇을 먼저 다스려야 하는지, 그 판단에는 수백 년 쌓인 규칙과 사례가 깔려 있다. 갈림은 무질서가 아니라, 같은 규칙을 밟고도 강조점이 달라지는 데서 온다.
이 갈림은 지금 더 흥미로운 자리에 놓여 있다. 사람이 아니라 기계에게 같은 사주를 물어도, 기계 안에서조차 판단이 갈리기 때문이다. 규칙을 한 칸씩 따져 가는 방식과, 수많은 사례를 익혀 짚어 내는 방식이 서로 다른 글자를 가리키는 일이 일어난다. 사람들 사이에서만 갈리던 것이, 이제는 한 기계 안에서도 갈린다.
그래서 묻게 된다. 답이 갈리는 이 자리에서, 무엇이 그 갈림을 가려 주는가. 규칙인가, 사례인가, 아니면 끝내 사람의 판단인가. 이 물음을 품고, 앞으로 몇 편에 걸쳐 명리와 기계가 만나는 자리를 들여다보려 한다.
나는 오래도록 이 갈림이 명리의 약점이라 여겼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게 본다. 사람을 하나의 답으로 가두지 않는 그 머뭇거림이야말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일의 시작인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