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과 학습, 두 관점
기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사주를 본다. 규칙을 따지는 방식과 사례를 익힌 방식. 그리고 그 기계가 스스로 가장 무겁게 짚은 자리는 일간과 계절이었다.
사주를 기계에게 풀게 한다고 하면, 흔히 한 가지 방식만 떠올린다. 규칙을 입력해 두고 그대로 따라가게 하는 것이다. 이 글자가 저 자리에서 왕하면 이렇게, 무엇이 무엇을 극하면 저렇게. 명리가가 외워 온 규칙을 코드로 옮겨, 차례로 적용하게 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기계가 사주를 보는 방식에는 다른 하나가 더 있다. 수많은 사주와 그 풀이를 통째로 익히게 하는 것이다. 규칙을 한 줄씩 일러 주는 대신, "이런 짜임은 대개 이렇게 풀린다"는 흐름을 사례 더미에서 스스로 잡아내게 한다. 사람으로 치면, 이론을 외운 사람과 수천 명을 봐 온 사람의 차이와 비슷하다.
이 두 방식은 같은 사주를 보고도 다른 글자를 짚을 수 있다. 규칙을 따지는 쪽은 정해진 절차에 충실하고, 사례를 익힌 쪽은 비슷한 사주들이 풀려 온 대로 따른다. 한쪽이 놓치는 미묘함을 다른 쪽이 잡기도 하고, 한쪽이 분명한 자리에서 다른 쪽이 머뭇거리기도 한다. 앞 편에서 본 명리가들의 갈림이, 기계 안에서 두 방식의 갈림으로 다시 나타나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이다. 사례를 익힌 방식에게 사주를 보일 때,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판단했는지를 되물을 수 있다. 그러면 기계가 사주의 여러 글자 가운데 어디에 가장 무게를 두었는지가 드러난다. 사람이 미리 "여기를 봐라"라고 일러 준 것이 아니라, 기계가 사례 더미에서 스스로 짚어 낸 자리다.
그 자리가 어디였는가. 일간이었다. 그리고 계절이었다.
명리를 배운 사람에게 이것은 묘한 울림이 있다. 일간은 사주의 주인, 곧 나 자신을 가리키는 글자다. 명리가 연주를 근본으로 삼던 옛 방식을 버리고 일간을 중심에 놓은 것이, 이 학문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이었다. 그리고 계절, 곧 어느 달에 태어났는가는 그 일간이 춥고 더운지 메마르고 습한지를 정하는, 조후의 바탕이다.
수백 년 명리가 가장 무겁게 여겨 온 두 자리, 나는 누구이며 어느 계절에 섰는가. 사람이 시키지 않았는데도, 사례를 익힌 기계가 바로 그 자리를 가장 무겁게 짚었다.
이것을 두고 "기계가 명리를 검증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계가 짚었다고 해서 명리가 옳다는 증명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수백 년 사람들이 쌓아 온 직관과, 사례 더미에서 기계가 스스로 잡아낸 결이, 같은 자리를 가리켰다는 것.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둘이 한 곳에서 만났다면, 그 자리는 적어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두 방식이 늘 같은 답을 내는 것은 아니다. 무게를 두는 자리는 닮아도, 거기서 끌어내는 결론은 갈리곤 한다. 그 갈림을 어떻게 가려 최종에 이르는지, 그리고 그 일에서 사람은 무엇을 하는지는 뒤에서 다시 다루려 한다.
나는 기계가 일간과 계절을 짚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오래된 직관이 허공에 뜬 것이 아니었구나 싶어서. 그리고 동시에 조심스러워졌다. 기계가 같은 자리를 짚는다는 것이, 이제 그 자리를 기계에 맡겨도 된다는 뜻은 아닐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