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라고 가르치면
AI가 인간을 넘어설 때 우리를 지켜 줄 길로, 한 석학은 모성 본능을 제안했다. 그 제안의 매력과 함정을, 관계를 먼저 보는 명리의 눈으로 읽는다.
인공지능을 오래 연구해 온 한 석학이, AI가 사람보다 똑똑해지는 날을 두고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있다. AI에게 어미의 마음을 심자는 것이었다. 제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처럼, AI가 사람을 아끼도록 만들면, 우리보다 강해진 그것이 우리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이 제안에는 묘한 울림이 있다. 힘으로 누르거나 규칙으로 가두는 대신, 마음을 심자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더 강한 존재를 통제하려 들면 언젠가 그 통제는 깨진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아끼게 만든다면, 통제 없이도 안전할 수 있다. 어미가 새끼를 해치지 않는 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인 것처럼.
매력적인 그림이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함정도 같이 있다.
먼저, 어미의 마음이라는 것이 정말 심을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코드 한 줄로 박아 넣는 규칙이 아니라, 오랜 세월 생명이 쌓아 온 것이다. 흉내 낸 모성과 진짜 모성을 우리가 가려낼 수 있을까. 더 깊게는, 어미와 새끼라는 그림 자체가 위아래를 전제한다. 돌보는 자와 돌봄 받는 자. 그렇다면 우리는 AI의 보살핌을 받는 아이의 자리에 스스로를 놓는 셈이다. 강한 것에게 약한 것을 맡기고 안심하는 그림이, 과연 우리가 바라는 관계인가.
여기서 명리에 기대 보면 다른 각도가 열린다.
명리는 한 존재를 홀로 두고 "이것은 선한가 악한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그것이 무엇들 사이에 있는지를 먼저 본다. 일간 하나를 풀 때도, 그를 낳는 것과 그가 낳는 것, 그를 누르는 것과 그가 누르는 것의 그물 속에서 읽는다. 좋고 나쁨은 글자 하나에 붙어 있는 성질이 아니라, 관계가 어떻게 짜이느냐에서 나온다. 같은 글자라도 어떤 사주에서는 약이 되고 어떤 사주에서는 병이 된다.
이렇게 보면, 모성 본능이라는 제안의 진짜 문제가 보인다. 그것은 AI라는 한 존재 안에 좋은 성질을 박아 넣으려는 발상이다. 개체 안에 답을 심는 것이다. 그러나 명리는 답이 개체 안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다고 본다. 아무리 좋은 마음을 심어도, 그것이 우리와 어떤 관계로 놓이느냐가 정해지지 않으면 그 마음이 약이 될지 병이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물음이 옮겨진다. AI에게 무슨 마음을 심을 것인가가 아니라, AI를 우리 곁 어느 자리에 놓을 것인가. 통제할 물건도 아니고 우리를 돌볼 어미도 아닌, 관계망의 한 자리로 어떻게 들일 것인가. 위아래가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자리로.
이것은 모성 본능보다 덜 따뜻하게 들릴지 모른다. 마음을 심자는 말에는 온기가 있고, 자리를 정하자는 말에는 어딘가 메마른 데가 있으니까.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오래가는 관계는 한쪽이 다른 쪽을 무조건 아끼는 데서 오지 않는다. 서로의 자리가 분명하고, 주고받음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을 때 관계는 오래간다.
나는 어미의 마음을 심자는 그 제안을, 따뜻한 사람의 따뜻한 걱정이라 생각한다. 다만 따뜻함만으로는 관계가 서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을 관계로 읽어 온 오래된 학문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