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옆의 사람인가
좋은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은 한 사람 안에서 답을 찾는다. 명리는 다르게 묻는다. 너는 누구 옆에 있는 사람이냐고.
좋은 사람이 되어라. 우리는 이 말을 들으며 자란다. 정직하라, 성실하라, 남을 해치지 말라. 이런 가르침은 모두 한 사람 안을 향한다. 네 안에 좋은 성품을 길러라, 옳은 규칙을 지켜라, 좋은 결과를 만들어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익숙한 잣대들이 대개 이렇다. 규칙을 따랐는가, 결과가 좋았는가, 성품이 바른가. 묻는 자리가 다 한 개인이다.
그런데 명리는 사람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명리에서 한 사람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그가 누구 곁에 있느냐다. 일간이라는 글자 하나만 떼어 놓고는 좋다 나쁘다를 말할 수 없다. 그 일간을 낳아 주는 글자가 곁에 있는지, 그를 눌러 주는 글자가 있는지, 그가 기댈 뿌리가 있는지, 그를 빼내 가는 것이 있는지. 같은 갑목이라도 곁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물가에 선 나무와 메마른 땅에 선 나무가 다르듯이.
그러니 명리에서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은, 늘 "이 사람은 무엇들 사이에 있는가"로 바뀐다. 성품도 운도, 그 사람 안에 박힌 고정된 성질이 아니라 관계가 빚어내는 결이다. 강한 글자도 그것을 받아 줄 짝이 없으면 외로이 부러지고, 약한 글자도 곁에서 받쳐 주면 살아난다.
이것이 좋은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과 다른 점이다. 명리는 "좋은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하기보다, "너는 지금 누구 옆에 있느냐"를 묻는다. 네 곁의 관계가 너를 살리는 쪽으로 짜여 있느냐, 아니면 너를 마르게 하는 쪽으로 짜여 있느냐.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자리에 놓이느냐에 따라 피기도 하고 시들기도 한다는 것을, 명리는 처음부터 전제한다.
이렇게 관계로 보는 자세는 AI를 두고 우리가 던지는 물음도 바꿔 놓는다.
우리는 흔히 묻는다. AI는 선한가 악한가, 안전한가 위험한가. 좋은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그대로 AI에게 옮겨, 그것 안에 좋은 성질을 박아 넣으려 한다. 그러나 명리의 방식으로 보면, 그 물음은 자리를 잘못 짚은 것이다. AI라는 존재 하나만 떼어 놓고 선악을 따지는 일은, 일간 하나만 떼어 놓고 길흉을 점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다.
물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AI는 우리 곁 어느 자리에 놓이는가.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쪽으로 관계를 짜는가, 아니면 우리를 마르게 하는 쪽으로 짜는가. 같은 기술이라도 어떤 자리에 들이느냐에 따라 약이 되고 병이 된다. 곁을 받쳐 주는 글자가 되기도 하고, 기운을 빼내 가는 글자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AI를 좋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AI와 좋은 관계를 짜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 삶의 어느 자리에 놓을지, 무엇을 주고받을지, 그 주고받음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어떻게 균형을 잡을지. 사람을 늘 관계로 읽어 온 학문이 잘하는 일이, 바로 이 자리를 가늠하는 일이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라는 말을 오래 믿었다. 그런데 명리를 들여다보며, 좋은 사람이 되는 일조차 혼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곁이 나를 만들고, 내가 곁을 만든다. 어쩌면 우리가 AI에게 물어야 할 것도, 네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우리가 너와 어떤 사이가 될 것이냐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