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신 앞에서
명리 공부는 결국 용신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로 모인다. 그만큼 중요하나 그만큼 헷갈리는 그 자리를 정직하게 만드는 일을, 이 시대의 도구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명리를 깊이 배우다 보면 모든 길이 한 자리로 모인다. 용신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사주의 여러 기운 가운데 무엇이 이 사람을 살리는 열쇠인지를 가리는 일, 명리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려운 관문이다. 공부가 깊어질수록 결국 이 물음 하나로 귀결된다. 그만큼 신중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한 글자를 잘못 짚으면 그 위에 쌓는 모든 풀이가 어긋나니까.
그런데 그 무게만큼, 용신을 잡는 일에는 헷갈림이 많다. 앞에서 보았듯 같은 사주를 두고도 판단이 갈리는 자리라, 자신 있게 한 글자를 짚는 일이 본디 어렵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그렇다. 명리를 오래 한 사람도 용신 앞에서는 흔들린다. 내가 명리를 배우던 어느 자리의 선생도 그랬다.
어려운 것을 어렵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헷갈리면 헷갈린다 하고 더 들여다보면 된다. 그런데 때로 그러지 못하는 자리를 만난다. 헷갈리면서도 헷갈린다 말하지 못하고, 모호한 말을 겹겹이 둘러 상황을 넘기는 것이다. 이 글자일 수도 저 글자일 수도 있다는 말이, 깊이로 들리기도 하고 얼버무림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 둘을 가려낼 길이, 듣는 사람에게는 없다.
여기에 명리의 오래된 약점이 있다. 명식을 푸는 일과 그 풀이를 말로 건네는 일이 한 사람 손에 다 맡겨져 있다는 것. 실력이 모자란 자리를 말솜씨로 가릴 수 있고, 듣는 사람은 그 둘을 구별하지 못한다. 명리가 깊어서가 아니라 모호해서 그럴듯해 보이는 일, 그 전도된 자리가 생긴다.
이 자리에서 앞서 보아 온 두 손이 새삼 떠오른다. 명식을 푸는 일은 정확하고 한결같은 손에 맡길 수 있다고 했다. 그 손은 흔들리지 않는다. 용신을 짚되 어느 법으로 그 글자에 이르렀는지, 두 관점이 같은 자리에 닿았는지 갈렸는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모호함을 깊이인 척 둘러댈 여지가 사라진다. 헷갈리면 헷갈리는 대로, 갈리면 갈리는 대로 드러나니, 말솜씨로 가릴 자리가 좁아진다. 정확함이 바닥을 단단히 깔면, 그 위에서 얼버무림이 설 곳을 잃는다.
그러나 정확함만으로는 절반이다. 용신을 틀림없이 짚어낸들, 그것을 한 사람의 삶에 어떻게 건네느냐는 또 다른 일이다. 이 글자가 이 사람에게 무슨 뜻인지, 막힌 자리에서 어떻게 트일 수 있는지, 정해진 사주 위에서 그래도 무엇을 해 볼 수 있는지. 여기서 명리의 진짜 깊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깊이는 모호함과 정반대 자리에 있다. 얼버무림이 모르는 것을 아는 척 가린다면, 깊이는 아는 것을 정직하게 건넨다.
그러니 길은 두 갈래로 나면서 하나로 모인다. 정확함으로 얼버무림의 틈을 좁히고, 그렇게 비어난 자리에서 사람은 명리의 깊이로 올라선다. 명식을 푸는 자리를 미더운 손에 내준 만큼, 사람은 헤아리는 일에 더 마음을 쓸 수 있다. 정확함이 모호함을 거두고, 깊이가 그 자리를 정직한 말로 채운다. 이 둘이 함께 갈 때, 명리는 말솜씨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자리에서 사람을 헤아리는 사유로 돌아온다.
돌이켜 보면, 명리가 가장 귀히 여기는 중화도 이것이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것을 바로잡아 제자리를 찾게 하는 일. 명리가 모호함 쪽으로 치우쳐 말장난이 되었다면, 그것을 정직함 쪽으로 되돌려 균형을 잡는 것 또한 중화다. 사람의 사주에서 중화를 찾던 그 지혜를, 이번엔 명리 자신에게 쓰는 셈이다.
명리를 탓할 일은 아니다. 깊이를 잃은 자리가 문제였지, 명리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할 일은 명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이를 정직하게 되찾아 주는 것이다. 어려운 것을 어렵다고, 갈리는 것을 갈린다고 드러내는 정확함 위에서, 그래도 사람을 일으키는 깊은 말을 건네는 것. 어쩌면 이 시대에 명리가 살아남는 길은, 더 그럴듯하게 말하는 데 있지 않고 더 정직하게 깊어지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