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는 늘 변해왔다
고법에서 신법으로, 명리는 기준을 바꾸며 살아남았다. 알고리즘 앞에 선 지금의 변화도, 굴복이 아니라 중을 지키며 올라타는 적응일 수 있다.
명리의 뿌리에는 역(易)이 있다. 그리고 역이라는 글자의 본뜻은 변화다. 변하지 않는 것을 적는 학문이 아니라, 변하는 것을 읽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명리가 시대에 따라 변해 온 것은 어긋남이 아니라, 제 이름값을 한 일이다.
실제로 명리는 한 번 크게 기준을 바꾼 적이 있다. 옛날에는 태어난 해, 곧 연주를 그 사람의 근본으로 삼았다. 가문과 혈통이 사람을 정하던 시대의 그림이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기준이 태어난 날의 천간으로 옮겨 갔다. 나를 가문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읽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전환을 두고 당시에도 적지 않은 다툼이 있었을 것이다. 수백 년 이어 온 기준을 바꾸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명리는 그 변화를 받아들였고, 그렇게 살아남았다.
만약 그때 명리가 옛 기준을 고집했다면 어땠을까. 변한 세상에서 더는 맞지 않는 그림을 붙들고, 박물관의 유물로 남았을지 모른다. 명리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변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명리는 또 한 번의 전환 앞에 서 있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이라는, 이전에 없던 것 앞에 말이다.
이 앞에서 두 가지 태도가 갈린다. 하나는 거부다. 사람의 일을 기계가 어찌 아느냐, 명리는 사람만의 것이라며 문을 닫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굴복이다. 기계가 더 정확하다니 다 맡기자, 사람은 손을 떼자는 것이다. 그런데 명리의 방식으로 보면, 이 둘은 모두 가운데를 잃은 자리다.
명리가 가장 귀히 여기는 것은 중(中)이다. 한쪽으로 다 기울지 않고 균형을 잡는 자리. 거부는 변화를 통째로 밀어내며 한쪽으로 기운 것이고, 굴복은 변화에 통째로 쓸려 가며 다른 쪽으로 기운 것이다. 둘 다 중을 놓쳤다.
그렇다면 중을 지키는 적응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앞서 보아 온 것이 그 답에 가깝다. 정해진 그림을 푸는 일은 더 정확한 손에 맡기되, 그 풀이를 의심하고 가려낼 눈은 놓지 않는 것. 움직이는 사람을 헤아리는 자리에는 사람이 그대로 서는 것. 기계를 거부하지도, 기계에 끌려가지도 않으면서,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지킬지를 스스로 가리는 것. 그것이 변화에 쓸려 가는 대신 변화에 올라타는 일이다.
올라탄다는 것은 굴복과 다르다. 파도에 휩쓸리는 사람과 파도를 타는 사람은 같은 물 위에 있어도 전혀 다르다. 한쪽은 물이 끌고 가는 대로 가고, 한쪽은 제 중심을 잡은 채 물의 힘을 빌려 나아간다. 명리가 고법에서 신법으로 넘어올 때 한 일이 그것이었다. 시대의 물살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읽는다는 제 중심은 놓지 않았다.
그러니 알고리즘 앞에 선 지금의 명리도, 또 한 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하는 것은 도구이지 중심이 아니다. 연주에서 일간으로 기준이 옮겨 가도 사람을 읽는다는 일이 변하지 않았듯, 푸는 일을 기계에 내주어도 사람을 헤아린다는 일은 사람에게 남는다. 도구는 시대를 따라 바뀌고, 중심은 그 너머로 이어진다.
이 글을 여기서 닫지만, 명리의 변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늘 다시 쓰여 온 학문은 앞으로도 다시 쓰일 테니. 다만 그 다시 쓰임이 무엇을 좇아 어디로 흘러가든, 가운데를 지키는 한 명리는 길을 잃지 않으리라 믿는다. 변할 줄 알았기에 여기까지 온 것처럼, 변할 줄 아는 한 그 너머로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