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그림과 움직이는 사람
명식을 규칙으로 푸는 일은 기계가 더 정확하다. 그러나 그 규칙에도 갈림과 한계가 있고, 움직이는 사람의 현상에 맞춰 푸는 일은 끝내 사람의 몫으로 남는다.
명리를 오래 들여다본 사람은 안다. 사주 하나를 푸는 데에 서로 다른 두 가지 일이 들어 있다는 것을.
하나는 명식을 규칙으로 푸는 일이다. 여덟 글자가 정해지면, 그 글자들이 어느 자리에서 왕하고 무엇이 무엇을 생하고 극하는지를 따져, 격을 잡고 용신을 가린다. 명식이라는 고정된 그림을 정해진 규칙에 비추어 읽어 내는 작업이다. 다른 하나는 그 결과를 움직이는 사람에게 푸는 일이다. 규칙이 가려낸 용신을 한 사람의 지금 형편 위에 내려놓고, 마주 앉은 이가 어디서 막혔는지 헤아리거나, 혹은 스스로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오랫동안 이 둘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같이 일어났다. 명식을 풀면서 사람을 보고, 사람을 보면서 명식을 풀었다. 그런데 이제 그 둘이 갈라지려 한다.
먼저 명식을 규칙으로 푸는 일을 보자. 어느 글자가 어느 자리에서 왕한지, 무엇이 무엇을 생하고 극하는지, 격은 무엇이고 용신은 어디인지. 이것은 정해진 규칙을 차례로 적용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규칙을 따라가는 일이라면, 기계가 사람보다 낫다.
낫다고 말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명식은 고정돼 있지만, 사람은 그것을 풀 때조차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날 몸이 무거우면 판단도 무거워지고, 마음이 어지러우면 손도 흔들린다. 앞에 앉은 이가 미더우면 좋게 보고 싶고, 어딘가 거슬리면 모질게 보게 된다. 같은 사주를 아침에 보는 것과 지친 저녁에 보는 것이 다르다. 기계에는 그런 흔들림이 없다. 어제 본 명식과 오늘 본 명식을 한결같은 손으로 풀고, 천 번을 물어도 천 번 같은 자리를 짚는다. 명식이 변하지 않는 그림인 한, 그 한결같음이 곧 정확함이다.
그러니 이 일은 기계에 내주어도 좋다. 아니, 내주는 편이 옳다. 사람의 기분과 컨디션에서 자유로운 손에 맡기는 것이, 정해진 그림을 푸는 데에는 더 미덥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야기는 너무 깔끔하다. 기계는 정확하고 사람은 흔들리니, 명식은 기계가 풀고 사람은 물러나면 된다는 식으로. 그러나 그 깔끔함은 거짓이다. 규칙으로 푸는 일이라고 답이 하나로 똑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명식을 두고도 풀이는 갈린다. 규칙을 따지는 방식과 수많은 사례를 익힌 방식이 서로 다른 글자를 짚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한쪽은 넘치는 힘을 식상으로 빼라 하고, 다른 쪽은 재성으로 거두라 한다. 둘 다 나름의 근거가 있고, 어느 쪽이 틀렸다 단정하기 어렵다. 정확히 푼다는 것이 곧 유일한 정답에 가닿는다는 뜻은 아니었던 것이다. 규칙의 층에도 갈림이 있고, 그 갈림 앞에서는 누군가 한쪽을 골라야 한다.
그리고 더 깊은 한계가 있다. 명식은 고정돼 있어도 사람은 고정돼 있지 않다. 기계는 용신이 금이라고 정확히 짚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금이 지금 이 사람에게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같은 용신이라도 오늘의 처지, 묻는 사연, 마주한 그 순간의 형편에 따라 다르게 풀려야 한다. 명식은 멈춰 있지만 사람의 현상은 늘 움직이는 까닭이다. 규칙이 가려낸 한 글자를 움직이는 삶의 어디에 내려놓아야 그 사람이 비로소 자기를 보게 되는지, 이것은 규칙 밖의 일이다.
게다가 명리라는 규칙 자체가 자연과 사람만 있던 시대의 그림이다. 알고리즘이 사람의 하루를 휘젓는 지금, 그 규칙이 미처 담지 못한 현상이 늘어 간다. 명식을 아무리 정확히 풀어도, 그 풀이 바깥에서 사람의 삶은 규칙에 없던 자리로 흘러간다. 정확히 푼다는 그 규칙마저, 한 시대의 그림일 뿐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기계가 자유로웠던 바로 그 감정과 컨디션이 여기서는 거꾸로 능력이 된다. 마주 앉은 이의 얼굴빛을 살피고, 머뭇거리는 말끝을 알아채고, 오늘 이 사람에게는 어떤 말이 너무 무거운지를 가늠하는 일. 스스로를 들여다볼 때도 마찬가지다. 어제와 오늘이 다른 내 마음의 결을 알아채는 것은, 흔들리는 자만이 할 수 있다. 흔들리기에 헤아릴 수 있고, 움직이기에 움직이는 것을 읽는다.
그러니 자리가 나뉜다. 정해진 그림을 푸는 일은 기계에 내주고, 사람은 움직이는 사람을 헤아리는 자리로 올라선다.
다만 여기에 놓치기 쉬운 함정이 있다. 푸는 일을 기계에 맡긴다고 해서, 명식을 읽어 내는 눈까지 놓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명식을 직접 풀 줄 아는 사람만이 기계의 풀이가 미더운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다. 어디서 갈렸는지, 왜 이쪽을 골라야 하는지, 이 답이 어딘가 어긋나 보이지는 않는지. 그 눈을 잃은 사람은 기계가 용신을 짚어 주면 그저 받아 적을 뿐, 미심쩍을 때 의심할 잣대가 없다.
계산기를 오래 써 온 사람을 떠올리면 쉽다. 암산을 아예 놓아 버린 이는 계산기가 엉뚱한 답을 내도 알아채지 못한다. 수의 감각이 남은 사람만이 "이 답은 자릿수가 이상한데" 하고 걸러 낸다. 명식도 같다. 더구나 토대를 모른 채 해석만 하려 들면, 그 위에서 하는 헤아림마저 부실해진다. 아래를 읽을 줄 알아야 그 위에서 제대로 헤아리는 까닭이다.
그러니 기계에 맡긴다는 것은 눈을 감는 일이 아니라, 눈을 뜬 채로 빌리는 일이어야 한다. 명식 읽는 힘을 살아 있게 지킨 사람이라야 기계를 부리지, 그 힘을 놓아 버린 사람은 기계의 답에 끌려간다.
이 올라섬을 두고 기계가 사람을 밀어냈다 여기면 그르친 것이다. 기계가 완벽해서 사람이 통찰로 떠밀린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규칙에도 갈림이 있고 한계가 있기에, 그 갈림을 사람의 삶에 비추어 고르고 그 한계 너머를 헤아릴 손이 더더욱 있어야 한다. 정확함과 헤아림은 위아래가 아니다. 둘 다 혼자서는 온전치 못한 채로, 서로의 모자람을 메우는 두 손이다. 그리고 그 두 손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같이 살아 있어야 한다.
기계가 정해진 그림을 더 정확히 풀수록, 사람은 움직이는 사람을 더 깊이 헤아려야 한다. 이상한 말 같지만 그렇다. 규칙이 미더워질수록, 그 결과를 살아 있는 삶으로 옮기는 마지막 손길의 무게가 오히려 커진다. 명리가 끝내 사람을 위한 학문이라면, 그 사람을 마주하는 자리만큼은, 그리고 스스로를 마주하는 자리만큼은 사람의 것으로 남는다.
나는 요즘 사주를 풀 때, 명식을 가려내는 일은 점점 더 미더운 손에 맡기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비어난 자리에서, 전보다 더 오래 상대의 얼굴을, 또 가끔은 나 자신을 들여다본다. 정확함을 내준 만큼, 헤아림에 마음을 더 쓰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이 시대가 명리에게, 그리고 명리를 곁에 둔 사람에게 내민 자리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