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띠부터 묻는가
처음 만난 사이에도 띠부터 묻는 우리. 그것은 태어난 해를 근본으로 삼던 옛 방식, 고법의 흔적이다. 한때는 띠가 곧 나였다는 이야기.
처음 만난 사이에도 우리는 곧잘 묻는다. "무슨 띠세요?"
생각해 보면 묘한 인사다. 사람을 알고 싶을 때 이름도 직업도 아닌 띠를, 그러니까 태어난 해를 먼저 묻는다. 그 한 글자로 나이를 가늠하고, 은근히 성격까지 점쳐 본다. 이 버릇은 어디서 왔을까.
앞서 1편에서 나는 띠가 사주 여덟 글자 중 한 글자, 그중에서도 가벼운 축이라고 했다. 지금의 명리는 태어난 날(일간日干)을 나로 삼는다. 그런데 그렇게 가벼운 글자라면, 사람들은 왜 하필 그 띠부터 묻는 걸까. 이 시리즈는 또 왜 가벼운 글자를 열두 편이나 들여 다루는 걸까.
답은 옛 방식에 있다.
지금처럼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삼게 된 것은 명리의 역사에서 비교적 나중 일이다. 그전 아주 오랫동안은 태어난 해, 곧 연주(年柱)를 나의 근본으로 삼았다. 이것을 고법(古法), 옛 법이라 부른다. 그 시대에 나를 나타내는 글자는 일간이 아니라 띠였다. 무슨 띠로 태어났는가가 곧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첫 대답이었다.
까닭이 있다. 가문과 혈통이 사람을 규정하던 시대였다. 내가 누구인가는 내가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느 핏줄에서 어느 해에 태어났느냐로 정해졌다. 태어난 해를 근본으로 삼는 사고는 그런 세계와 맞물려 있었다. (해를 기준으로 삼던 명리가 어떻게 날을 기준으로 바꾸게 되었는지, 그 전환의 이야기는 「명리의 역사」에서 따로 다룬다.)
그 옛 방식은 지금 명리의 본류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우리가 무심코 "무슨 띠세요"라고 물을 때, 거기엔 태어난 해로 사람을 읽던 아주 오래된 사고가 화석처럼 남아 있다. 띠로 사람을 본다는 것 자체가, 실은 명리의 가장 오래된 한 층을 더듬는 일인 셈이다.
그러니 이 시리즈가 띠를 정성껏 다루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띠는 지금 기준으로는 곁가지지만, 한때는 사람을 읽는 중심이었던 글자다. 가장 오래된 자리에서 내려온 글자라서, 가장 친숙하면서도 가장 깊다.
새것이 옛것을 밀어낸 자리에도, 옛것은 말투와 습관 속에 남는다. 더는 태어난 해로 사람을 규정하지 않는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띠를 묻는다. 그 물음을 미신이라 웃어넘기기 전에, 나는 거기 깃든 오래된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고 싶다. 사람을 한 글자로라도 먼저 알고 싶어 하는, 그 오래되고 다정한 조바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