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띠가 있다, 십이시(十二時)
띠는 해에만 있지 않다. 하루를 열둘로 나눈 십이시와, 한밤 자시가 하루의 시작인 까닭. 한 해의 흐름이 하루 안에 그대로 접혀 있다는 이야기.
띠는 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에도 띠가 있다.
옛사람은 하루를 열둘로 나누어 십이지를 붙였다. 이것이 십이시(十二時)다. 자시(子時)에서 시작해 축시·인시로 이어지다 해시(亥時)로 끝난다. 한 시(時)가 지금의 두 시간이니, 열둘이 모여 하루가 된다. 자시는 밤 열한 시부터 새벽 한 시, 한밤중이다.
왜 한밤중인 자시가 하루의 첫머리일까. 동지 편에서 보았던 이치가 여기서도 돈다.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양(陽)이 처음 되살아난다. 자시는 그 한밤의 바닥, 새 하루가 어둠 속에서 막 시작되는 자리다. 그래서 명리에서 하루는 동틀 무렵이 아니라 한밤중에 시작된다.
이 십이시가 바로 사주의 시지지(時支)다. 메타 편에서 사람은 누구나 띠를 넷 가졌다고 했는데, 그 마지막 하나, 태어난 시각의 띠가 이 십이시에서 나온다. 한밤에 났으면 자시, 한낮에 났으면 오시(午時)의 띠를 갖는 셈이다.
시계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해의 자리와 짐승의 움직임으로 때를 가늠했다. 십이시에 동물을 앉힌 데에도 그 흔적이 있다고들 한다. 한밤에 가장 부산한 쥐의 시각이 자시요, 동트기 직전 가장 사나운 호랑이의 시각이 인시요, 해가 하늘 한가운데 선 한낮이 말의 시각인 오시라는 식으로. 짐승의 하루가 곧 시간을 읽는 눈금이었던 것이다.
한 해를 하루로 좁히면 시간의 결이 또렷이 드러난다. 우리가 사는 하루 안에도 자시의 한밤과 오시의 한낮이 있고, 어둠에서 시작해 환해졌다 다시 저무는 한 바퀴가 들어 있다. 큰 한 해의 흐름이 작은 하루 속에 고스란히 접혀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날마다 한 생을 작게 한 번씩 살아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일 밤 자시의 어둠에서 다시 시작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