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 한반도에 뿌리내리다
바다 건너의 학문이 우리 땅에 뿌리내리기까지. 조선의 관상감과 명과학, 한살이 곳곳에 스민 명리, 그리고 근현대의 부침.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바다 건너에서 일어났다. 이제 명리가 우리 땅으로 건너온다.
음양과 오행, 천간과 지지로 세상을 읽는 이 학문은 어느 날 갑자기 들어온 것이 아니다. 중국의 글과 학문이 오랜 세월에 걸쳐 한반도로 흘러드는 동안, 그 안에 섞여 천천히 스몄다. 달력을 만들고 절기를 따지고 길흉을 가리는 일과 한 몸이었으니, 어느 한 해를 콕 집어 이때 들어왔다 말하기 어려울 만큼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러므로 우리 선조들이 아주 새로운 체계를 따로 세웠다기보다는, 중국에서 무르익은 자평의 명리를 받아들여 이 땅의 살림에 맞게 길들인 쪽에 가깝다.
조선에 이르면, 명리는 한갓 저잣거리의 점술로만 떠돌지 않았다. 나라가 그것을 어엿한 제도 안에 두었다. 조선은 천문과 역법, 그리고 사람의 운명을 헤아리는 일을 함께 맡아보는 관청을 두었는데, 처음에는 서운관(書雲觀)이라 불렀다. 이 이름은 1466년 세조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바뀐다. 그 관상감 안에서 운명을 다루는 갈래를 명과학(命課學)이라 했다. 명과학은 천문학, 지리학과 함께 음양과(陰陽科)라는 과거 시험의 세 분야를 이루었고, 음양과는 잡과(雜科)에 속한 시험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운명을 읽고 좋은 날을 가리는 일이 한때는 나라가 정식 시험을 치러 인재를 뽑을 만큼 진지하고 공적인 앎이었다는 뜻이다.
명과학을 익혀 관리가 된 이들은 무슨 일을 했나. 나라의 큰 행사와 제사, 혼례와 장례의 날을 가리고, 왕실의 운을 헤아리고, 때로 사람의 명을 짚었다. 운명을 읽는 일이 궁궐 깊은 곳에서 국가의 일로 다뤄진 것이다.
그러나 명리가 정작 깊이 뿌리내린 곳은 궁궐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살림살이였다. 혼인을 앞두고 두 집안은 신랑 신부의 사주를 맞춰 궁합을 보았고, 아이가 나면 그 사주에 모자란 기운을 채워 줄 이름을 지었으며, 집을 짓고 멀리 떠나는 큰일 앞에서는 좋은 날을 골랐다. 태어나 혼인하고 이름을 얻고 길을 나서는, 한 사람의 한살이 고비고비에 명리가 함께 있었다. 사주는 어느새 학문이기 이전에 풍속이 되어 있었다.
근대로 넘어오며 명리는 궁궐과 관청을 떠나 다시 거리로 내려왔다. 새 문물이 밀려들던 시절에는 낡은 미신이라 손가락질받으며 음지로 밀려나기도 했고, 삶이 고단하고 앞이 보이지 않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다시 제 사주를 손에 들고 모여들기도 했다. 밀려나고 다시 찾아오기를 거듭하면서도, 명리는 이 땅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사람들이 제 삶을 어딘가에 비추어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마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땅에서 명리가 어떤 스승들의 손을 거쳐 어떤 갈래로 갈라지고 이어져 왔는지, 그 자세한 계보는 여기 다 적기 어렵다. 그것은 한 줄로 간추리기에는 너무 가깝고, 아직도 너무 살아 있는 이야기다. 그 몫은 이 땅에서 오래 명을 짚어 온 이들의 입과 손에 맡겨 두는 편이 옳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제가 태어난 날을 손에 들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묻고 있다. 바다 건너에서 시작된 그 오랜 물음이, 지금은 우리말로 묻고 우리말로 답해지고 있다.
참고
- 위키백과 「서운관」 — 1466년(세조 12) 서운관을 관상감으로 개칭.
-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조실록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상감」 — 음양과가 천문학·지리학·명과학의 삼학으로 나뉜 잡과였다는 서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