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운데서 잇고 받치는 흙, 토(土)
다섯 기운의 한가운데, 토. 모든 계절 사이에 들어 잇고 받치는 흙의 기운으로, 자기 색을 내세우지 않고 가운데를 지키는 일의 값을 읽는다.
화(火) 다음은 토(土)다. 다 타오른 불이 재가 되어 흙으로 가라앉으니, 화(火)가 낳은 자식이 토(土)다.
토(土)는 흙이다. 만물이 딛고 서는 땅, 씨를 심고 거두는 들판이다. 옛사람은 이 성질을 가색(稼穡), 심고 거둠이라 했다. 무엇이든 받아 안고, 길러 내고, 다시 내어준다. 그 자체로 화려하지 않지만, 화려한 모든 것이 그 위에서 자란다.
토(土)는 자리가 독특하다. 목(木)·화(火)·금(金)·수(水)가 봄·여름·가을·겨울을 하나씩 맡았다면, 토(土)는 어느 한 계절에 매이지 않는다. 봄이 여름으로, 여름이 가을로 넘어가는 길목마다 토(土)가 들어선다. 계절과 계절 사이를 잇는 환절(換節)의 자리, 그것이 토(土)다. 다섯 기운의 한가운데 서서 나머지 넷을 이어 주는 셈이다.
그래서 토(土)인 사람은 묵직하고 미덥다.
쉽게 들뜨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옛사람은 토(土)의 덕을 신(信), 곧 믿음이라 보았다. 늘 그 자리에 있어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사람, 서로 다른 이들 사이에 들어 다툼을 누그러뜨리는 사람. 가운데에서 잇고 받치는 일이 토(土)의 몫이다.
같은 토(土)라도 두 얼굴이 있다. 우뚝 솟은 큰 산 같은 흙과, 낮게 엎드려 작물을 길러내는 밭 같은 흙이다. 앞엣것이 무(戊)이고 뒤엣것이 기(己)다. 그 차이는 천간 편에 맡기고, 여기서는 둘을 아우르는 토(土)를 본다.
토(土)가 가운데에 선다는 말은, 가장 많은 관계를 짊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토(土)는 화(火)에게서 났다. 불이 남긴 재가 땅을 기름지게 하니, 화(火)가 토(土)를 낳는다. 그리고 토(土)는 그 품에서 쇠를 길러 낸다. 단단한 흙이 오래 다져져 광물이 되니, 토(土)가 금(金)을 낳는다. 받아서 품고, 품어서 새것을 내어주는 자리다.
다스리는 관계도 토(土)의 가운데로 모인다. 토(土)는 수(水)를 다스린다. 둑이 물을 막고, 흙이 물길을 잡아 준다. 막힘없이 흐르기만 하는 물은 끝내 범람하니, 흙이 그 흐름에 자리를 정해 준다. 그리고 토(土)는 목(木)에게 다스려진다. 나무뿌리가 흙을 파고들어 움켜쥔다. 이 또한 둘이 서로를 붙들어 함께 사는 일이다.
낳고, 낳아지고, 다스리고, 다스려지는 그 모든 관계가 토(土) 한가운데로 모인다. 토(土)는 다섯 기운이 서로 손을 맞잡게 하는 매듭이다.
여기서 지금으로 눈을 돌린다.
지금은 자기 색이 또렷한 사람을 떠받드는 시대다. 한 줄로 설명되는 개성, 분명한 입장, 남과 다른 한 가지.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가운데를 지키는 사람은 어중간하거나 줏대 없어 보이기 쉽다. 잇는 사람보다 튀는 사람이 먼저 눈에 띈다.
그러나 계절과 계절이 저절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 토(土)가 들어 가만히 손을 건네야, 봄이 여름이 되고 여름이 가을이 된다.
서로 등 돌린 사람들 사이에 들어 말을 잇는 이, 모두가 제 빛을 내세울 때 묵묵히 그 빛들을 받쳐 주는 이. 나는 그런 사람을 볼 때마다, 그가 선 자리가 실은 가장 어려운 한가운데라는 것을 새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