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어서 끝내 살아남는 것, 을목(乙木)
곧은 갑목 다음에 오는 을목. 바람에 휘어 살아남는 풀과 덩굴의 기운으로, 적응이 곧 생존이 된 시대를 읽는다.
갑(甲) 다음에 을(乙)이 온다.
같은 나무(木)인데 성질은 정반대다. 갑(甲)이 하늘을 향해 곧게 솟는 큰 나무라면, 을(乙)은 그 발치에서 자라는 부드러운 것들이다. 화초, 덩굴, 들풀, 바람에 눕는 갈대.
을(乙)은 다듬어진 나무다. 산에 제멋대로 선 거목이 아니라, 누군가의 정원에 가꿔진 꽃이고, 담장을 타고 오르도록 길든 덩굴이다. 갑(甲)이 손대지 않은 날것의 자연이라면, 을(乙)에는 사람의 손길이 배어 있다. 혹은 살아남으려 스스로를 다듬은 흔적이 남아 있다.
부드럽다고 약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강풍이 불면 곧은 나무는 부러지지만, 풀은 눕는다. 그리고 바람이 지나가면 다시 일어선다. 을(乙)의 힘은 버티는 데 있지 않고 휘는 데 있다. 휘어졌다가 돌아오는 그 탄력, 좀처럼 죽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 콘크리트 틈을 뚫고 올라오는 잡초가 그렇다.
그래서 을(乙)인 사람은 현실에 밝다. 상황을 읽고, 사람들 사이를 부드럽게 오가고, 막히면 돌아갈 길을 찾는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갑(甲)과 달리, 을(乙)은 끝내 살아남는 법을 안다.
여기서 지금으로 눈을 돌린다.
지금은 어쩌면 을(乙)의 시대다. 평생직장이 사라지고,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는 세상. 한 자리를 고집하기보다 빠르게 갈아타고 적응하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휘는 것이 곧 능력이 된 시대다.
그러나 휘기만 하는 삶에는 한 가지 그늘이 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늘 눕기만 한다면, 정작 일어서야 할 때 어디로 일어설 수 있을까. 을(乙)의 진짜 힘은 아무 데로나 휘는 데 있지 않다. 휘어졌다가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있다. 돌아올 자리, 굽혀도 놓지 않는 뿌리 한 줄.
휘는 법은 누구나 시대에서 배운다. 다만 휘어도 끝내 놓지 않을 뿌리 한 줄을 가졌는지, 그것만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