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아서 길러내는 흙, 기토(己土)
무토 다음에 오는 기토. 씨앗을 받아 작물을 키우는 낮은 밭의 기운으로, 드러내야 사는 시대에 보이지 않게 길러내는 일을 읽는다.
무(戊) 다음에 기(己)가 온다.
같은 흙이지만 높낮이가 다르다. 무(戊)가 우뚝 솟은 큰 산이라면, 기(己)는 그 산 아래 펼쳐진 낮은 밭이다. 사람이 갈고 씨를 뿌리는 땅, 작물을 길러내는 기름진 흙.
기(己)는 다듬어진 흙이다. 손대지 않은 무(戊)의 산과 달리, 기(己)에는 사람의 호미질과 쟁기질이 닿아 있다. 갈고 고르고 거름을 주어, 무언가를 키워내기 좋게 만든 땅. 갑(甲)과 병(丙)과 무(戊)가 날것의 자연이었다면, 을(乙)과 정(丁)과 기(己)에는 손길이 닿아 있다.
밭의 일은 길러내는 일이다.
밭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씨앗을 받아 품고, 묵묵히 키우고, 다 자라면 내어준다. 정작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은 탐스러운 열매지, 그것을 키운 흙이 아니다. 기(己)인 사람이 그렇다. 자기를 낮추고, 남을 받아들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을 키운다.
낮다고 약한 것이 아니다. 가장 낮은 땅이 가장 많은 것을 길러낸다.
그러나 늘 자기를 낮추다 보면, 정작 자기 자신을 잊기 쉽다. 남의 씨앗만 키우다 제 밭에는 아무것도 심지 못한 채로.
여기서 지금을 본다.
지금은 길러내는 사람보다 빛나는 사람이 주목받는 시대다. 누가 무엇을 키워냈는지보다, 누가 더 환히 드러났는지를 먼저 센다. 묵묵히 뒤를 받치는 일은 쉽게 잊힌다. 밭은 늘 그 자리에 있는데, 사람들의 눈은 열매에만 가 있다.
그러나 열매를 맺게 한 것은 끝내 흙이었다.
부모, 스승, 먼저 자리를 내어준 선배, 이름 없이 도운 손들. 모두가 열매가 되려 다투는 시대에, 기(己)는 보이지 않게 받치는 일에도 그 나름의 보람이 있다고 말한다.
열매는 햇빛이 키운 듯 보이지만, 정작 그것을 품어 올린 것은 늘 말없는 흙이었다. 그 말없는 흙 같은 사람들을, 나는 가끔 떠올린다.